축지법이 뭐 별거냐?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 계룡산 가까이에서 함께 산행하던 때의 일이라 합니다. 경허 스님은 키가 구척 가까이나 되었지만 만공 스님은 단아한 몸집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만공 스님은 스승의 바랑까지 잔뜩 짊어진 채 짚신 한 켤레에 의지하여 금강산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던 터라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앞서가던 경허 스님이 슬쩍 뒤돌아보니 그야말로 초죽음이 돼서 쉬어 갔으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만공아, 다리가 아프냐?"

"짚신에 발가락이 닳아서 피가 나올 정도입니다."

물어보는 것이 야속하다는 듯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축지법을 가르쳐 주랴?"

"?"

 

만공 스님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축지하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워낙 크신 분이니 그런 도술을 숨기고 계셨을지도 모르지...' 스승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이 대단했던 만공 스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경허 스님을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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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막 보리베기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두 스님은 마침 보리밭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밭에서는 건장한 남자가 보리를 베고 있엇고 부인인 듯한 아낙네는 조금 떨어져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경허 스님은 갑자기 성큼성큼 보리밭 가운데로 들어가더니 그 아낙네에게 합장 인사를 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낙네는 부끄러운 듯 아이를 내려 놓고 얼른 일어나 합장을 했습니다. 경허 스님은 정중하게 시주를 부탁했습니다.

"보리밭에 시주할 게 뭐 있겠습니까? 있다면 이 보리밖에 .."

"보리 말고 시주할 게 있다면 주시겠습니까?"

"있기만 한다면 뭘 아쉬워하겠습니까?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런데 아낙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허 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럼,  젖 동냥을 좀 하겠습니다."

 

 경허스님이 다짜고짜 그녀의 옷을 헤집고 젖을 빠는 것이 아닙니까? 멀리서 보고 있던 만공 스님은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괴승이라고 소문난 스승이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일이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보리를 베고 있던 남자가 시퍼런 낫을 들고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 나 죽네!"

아낙네의 외마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경허 스님은 달려오는 남자를 보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만공 스님이 뒤를 돌아보니 눈이 벌개진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닙니까? 사태를 짐작한 만공 스님은 그때부터 냅다 뛰기 시작해서 숨 한번 쉬지 않고 산 고개 하나를 후딱 넘어 버렸습니다.

 

짐은 한짐을 졌겠다, 숨이 턱까지 차 올라 더 이상 뛰기가 어려워진 만공스님은 저기 앞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 경허 스님을 발견하고 급하게 멈춰 섰습니다.

 
"아니 스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만공아 뒤를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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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스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먼 길을 달려오다니, 남자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다리가 아프냐?"

"다리가 다 뭡니까? 목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다리 아픈 것이 싹 달아나 버렸습니다."

"허허, 그렇지. 축지법이 뭐 별거냐?"

"예?!"

 

 

경허스님은 제자에게 마음의 힘이 무엇인가를 그렇게 일러 주었던 것입니다. 세상일이 다 그와 같습니다. '나는 몸이 아프다, 병이 들었다..' 어찌보면 그 모든 것은 다 꾀병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병든 몸에 집착하니 아플 수밖에요.

 

이 아니라 나이도 없고 남녀도 없고 선악도 없는

허공에 마음을 두면

그때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허공은 늘 우리들 몸을 들락거리며 우리우주연결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허공 부딪힘, 허공 부딪힘, 부딪힘, 기 부딪힘,

관념관념 부딪힘... 바로 그런 부딪힘의 연속, 그 이상 이하 아닙니다.

 

새벽은 새벽에 눈뜬 자만이 볼 수 있다.p.3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