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마리 암소

 

 

한 의사가 아프리카 어느 외진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했는데

이 마을은 교통과 통신이 불편할 뿐 그 자체로는 매우 풍요로운 마을이었습니다.

목축과 농사를 주로 하는 이 마을에서 의사는 금방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고,

특히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귀향한 젊은 청년 한사람과는 친형제처럼 친해졌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진 영농기법과 축산기술을 배워 이 마을에서도

가장 부유한 축에 끼었고, 장차 커다란 기업을 일으켜 빈곤에 허덕이는 조국의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꿈을 지닌,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받던 청년이었습니다.

당연히 혼기가 늦어진 이 청년의 결혼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결혼을 하려는 청년이 가축을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장인 될 사람에게

<이거 받고 딸 주쇼>라고 청혼을 해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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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훌륭한 신부감에겐 살찐 암소 세 마리를 주는데 이 <암소 세 마리 >는 이 마을이

생겨난 이후로 단 두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좋은 신부감에게는 보통 암소 두 마리를

주면 청혼이 승낙되고 보통 신부감은 암소 한 마리 정도면 승낙이 되는데,

그 암소가 살찐 암소냐 아니면 늙은 암소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청년의 <사모하는 정도>에 달렸습니다.

 

대개의 아낙네들은 빨래터나 우물가에 모여 앉아서 누구는 염소 두 마리에

시집온 주제에 잘난 체를 한다는 둥 내가 이래봬도 암소 두 마리였어 라는 둥

입방아를 찧었는데, 이렇듯 시집 올 때의 청혼선물 과다에 따라 여인의 몸값이 정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었습니다.

 

이 의사가 어느 날 피곤한 하루 일을 마치고 잠시 창가에 앉아 차 한 잔을 하면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길거리가 떠들썩해지기 시작해서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노래하고 소리쳐 축복의 말을 하고 있는 가운데 자기가 매우 친하게 지내는

바로 그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결혼하고 싶어하는 청년이 소를 끌고 집을 나서면 보통은 그 친척들과 친구들이

뒤를 따라가며 어느 집으로 가는지를 확인하고 축하해주며 청혼 사실과 승낙여부에 대한

증인이 되어주는데, 이 부자 청년에 대한 마을의 기대를 반영하듯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이 청년이 어느 집으로 갈 것인가를 궁금해하며 뒤를 따라가다 보니

마치 동네 축제처럼 행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이 청년이 몰고 나온 청혼 선물은 놀랍게도 <살찐 암소 아홉 마리>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술렁댄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도 그럴 것이 아홉 마리의 암소면

그 동네에선 당장에라도 팔자가 늘어진 <있는 축>에 낄만한 재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마을 촌장의 집도 지나가고, 바나나 농장의 지역 유지의 집도 그냥 지나치고,

이 마을 학교 여선생네 집도 그냥 지나치면서 흙먼지 일어나는 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더니 어느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서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촌장과 촌장의 날라리 딸, 바나나갑부와 갑부의 오동통한 셋째 딸, 눈물을 철철 흘리는

여선생 등등의 커다랗게 열린 동공 앞에서 남루한 노인의 집 기둥에

아홉 마리 암소의 고삐를 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노인의 딸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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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노인의 딸은 말라깽이에다가 키가 너무 크고

병약한 외모에다가 마음까지 심약해 늘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자기 그림자만 보아도

깜짝 깜짝 놀라곤 하는 전형적인 염소 두어 마리짜리 처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청년이 미쳤다고 수군대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그 처녀가 마법으로 청년을 홀린 것이 틀림없다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본국에 돌아온 뒤에도 그 청년이 왜 아홉 마리의 암소를 몰고

그 보잘것없는 처녀에게 청혼을 하였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젠 중년이 된 의사는 다시 한번 그 마을로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이젠 어엿한 기업가가 된 <그 청년 >을 다시 만나게 되어

정답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면서 의사는 물었습니다. 당신의 그때 그 행동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며 그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사업가는 빙긋 웃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이 의사의 궁금증만 더욱 커져

갈 즈음에 찻물을 가지고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의사는 많은 백인 여자와 흑인 여자를 보아왔지만 이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흑인여인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우아한 자태와 유창한 영어,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까지…

아득해진 정신을 수습한 의사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이 그 때의 말라깽이 처녀 말고

또 다른 아내를 맞이했구나.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이 사람과 어울리지`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년 사업가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찻물을 두고 나가는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을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말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그때의 그 심약했던 처녀입니다.` `헉!! 정말로요?`

의사는 아연실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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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해진 의사를 바라보면서 청년 사업가는 말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 사람을 사랑했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던

긴 세월 속에서도 저 사람의 맑고 고운 눈동자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저 사람과의 결혼을 꿈꿔 왔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마을에선 청혼의 관습 때문에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여자들의 세계에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스꽝스럽다 여겼지만

그런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저도 청혼을 위해선 가축을 몰고 가야만 했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얻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청혼의 순간에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의 자기가치를

결정 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사무치는 제 소중한 감정입니다.

저는 제 아내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한 두 마리의 암소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세 마리를 선물하면 그 옛날 세 마리를 받았던 훌륭했던 사람들과 비교될 것이고 ,

그러면 제 아내는 또 움츠려들지도 모르기 때문에 저는 세 마리를 훨씬 뛰어넘는

아홉 마리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처음에 아내는 아홉 마리의 암소 때문에 무척 놀란 듯 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고 제 사랑의 진정함을 느끼게 되자 아내는

아홉 마리의 암소의 가치가 과연 자신에게 있는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도 부족하지만 당신이 몰고 온 아홉 마리 암소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아요.>

`아내는 그 후로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에 걸맞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았습니다.

항상 저의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공부를 하거나 외모를 꾸미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이야기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점점 아름다워져만 갔습니다.

`저는 아내의 예전의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똑같이 사랑하지만

아마도 아내는 그전의 모습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더욱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니 저도 만족스럽습니다.

`제가 아홉 마리의 암소를 몰고 간 것은 아홉 마리의 가치를 주고자 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 또한 하나의 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가치 부여의 틀을

뛰어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내를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마음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나서 하는 말이지, 사실은 제 아내와 장인은 제가 맨몸으로 왔어도

제 청혼을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 일가의 맑은 영혼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 아내는 이 마을의 전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엔 수군거리던 아낙들도

제 아내의 요즘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내의 밝은 미소를

사랑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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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이런 관습이 사라지겠지만 이런 정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최고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 <아홉 마리 암소>의 이유였습니다.`

 

긴 이야기가 끝난 후 이 의사는 말없이 사업가의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